얼마 전에 카메라 롤을 넘기다가 3년 전 베트남 여행 사진이 나왔어요. 어느 길거리 식당에서 찍은 쌀국수 사진인데, 진짜 맛있어 보이거든요. 근데 어디서 찍었는지, 무슨 도시였는지, 왜 찍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옥상 바 같은 데서 두 사람이랑 찍은 사진도 있는데,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거기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가물가물하고요.
3주간의 여행이 맥락 없는 사진 나열로 전락한 거예요. 남의 USB에서 나온 여행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일기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말해두자면, 예전의 저는 카페에서 몰스킨 노트에 뭔가 쓰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눈을 굴리는 쪽이었어요. 좀 꾸미는 것 같잖아요. 여행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연출하는 느낌. 사원에 빛이 내려앉는 순간을 글로 옮기는 그 시간에, 그냥 사원을 눈에 담으면 안 되나 싶었거든요.
여행 일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린넨 에코백 들고 다니고, 말차 마시고, 만년필 취향이 확고한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편의점 커피를 달고 살고, 제 글씨는 의사 처방전 수준이에요.
그래서 친구가 모로코 여행 전에 싸구려 스프링 노트를 건네면서 "그냥 어디서 밥 먹었고 누구 만났는지만 써"라고 했을 때, 그냥 고마워~ 하고 받은 거였어요. 구겨진 우비 옆에 가방 바닥에 쑤셔넣고 3일 동안 꺼내지도 않았죠.
최소한의 일기
마음이 바뀐 건 뭔가 대단한 깨달음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냥 심심해서였어요. 에사우이라의 한 카페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할 게 없었고, 노트가 가방에 있었어요. 그래서 꺼내 펼치고 지난 며칠 뭘 했는지 적었어요.
대단한 건 없었어요. 날짜. 도시. 뭘 했는지. 놀랐던 것 하나. 그게 전부예요. 5분이면 끝났어요. 대충 이런 식이었죠:
"11/3, 에사우이라. 성벽 위를 걸었고 메디나에서 한 시간 헤맸다. 항구 근처 가판대에서 인생 정어리를 먹음 --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아저씨였는데 손짓이랑 생선 앞에서의 묘한 동질감만으로 대화가 됐다. 밤에 이렇게 추울 줄 몰랐다."
멋진 문장 없음. 깊은 생각 없음. 그냥 있었던 일.
사진이 기억을 못 살리는 이유
적기 시작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사진은 내가 본 걸 담아요. 근데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누가 옆에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안 담겨요. 석양 사진은 그냥 석양 사진이에요. 하지만 "리야드 옥상에서 방금 약혼한 네덜란드 커플이랑 석양을 봤는데, 너무 행복해하는 게 살짝 부러우면서도 좀 얄미웠다" -- 이건 기억이에요. 읽으면 그 순간이 다시 살아나거든요.
모로코 일기를 한 8개월 뒤에 다시 읽었는데, 갑자기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향신료 시장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어요. 새벽 5시에 벽을 타고 울려 퍼지던 아잔 소리가 떠올랐고요. 밤에 혼자 메디나를 걸으면서 살짝 긴장했던 것도, 밤에는 골목이 헷갈린다며 리야드까지 데려다준 가게 아저씨도 생각났어요. 사진만 봤으면 이런 건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깊이는 상관없다
여행 일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뭐냐면,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거예요. 전혀요. 글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어도 괜찮아요. 제 일기는 솔직히 재미없어요. 보고서 같을 때도 있어요. "시장 갔다. 오렌지 샀다. 마라케시까지 버스 3시간인데 에어컨 고장남."
근데 이 시시한 디테일들이 진짜 기억을 끌어내요. 고장난 에어컨 이야기를 보면 옆자리에서 아몬드를 나눠주며 딸 결혼식 이야기를 해준 아저씨가 떠올라요. 오렌지를 보면 다리자어로 감사 인사를 하려다 발음을 너무 엉망으로 해서 가게 아저씨가 한참을 웃다가 오렌지를 두 개 더 얹어준 게 떠올라요.
"숙소 근처에서 끝내주는 쌀국수를 먹었다. 옆 테이블 브라질 사람이랑 한 시간 동안 축구 이야기를 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일기 한 줄이에요. 이것만으로 충분해요.
종이 vs 폰
이 질문을 자주 받는데, 솔직히 아무거나 편한 걸로 하면 돼요. 둘 다 해봤어요. 폰 메모가 더 편하긴 해요 -- 어차피 항상 들고 다니고, 사진도 넣을 수 있고, 악필 걱정도 없으니까요. 종이는 또 나름의 맛이 있어요. 손으로 직접 쓰면 뭔가 머릿속에 더 깊이 남는 느낌이에요. 생각이 느려지면서 주변을 더 잘 살피게 되고요.
너무 피곤해서 글 쓸 기운이 없을 때는 음성 메모를 남기기도 했어요. 자기 전에 폰 들고 2분 정도 "오늘 이거 했고, 이게 재밌었고, 이 사람이 이런 웃긴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요. 두서없고 지저분하지만 나중에 들으면 충분히 쓸모 있어요.
카페 의식
예상 못 했던 게 하나 있어요. 일기 쓰기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됐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현재에 집중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카페에 한 시간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핑계가 생긴 거예요. 커피 시키고, 노트 펼치고, 오전에 있었던 일을 갈겨쓰고.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고. 또 조금 쓰고.
이전에는 잘 안 되던 건데, 여행 속도를 확 줄여줬어요. 오늘 있었던 일을 적을 거라는 걸 알면 하루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거든요. "아, 이건 나중에 적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요. 뭔가를 억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같은 하루인데 더 선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안 적은 게 아쉬운 것들
일기를 쓰기 전에 남미에서 3개월을 보낸 적이 있어요. 큰 틀은 기억나요 --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순서로 돌았다는 것. 하지만 구체적인 건 다 사라졌어요. 키토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신세를 진 가족이 있는데, 집은 눈에 선한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보고타에서 여행 중 최고의 밤이었던 날이 있는데, "밖에 나가서 놀았고 좋았다" 말고 실제로 뭘 했는지 떠오르질 않아요.
분명 의미 있었을 몇 주의 시간이 흐릿한 감정 조각이랑 파편적인 이미지 몇 장으로 쪼그라든 거예요. 비극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던 손실이에요.
그냥 시작해요
예쁜 가죽 노트에 좋은 펜 사서 매일 쓰겠다고 다짐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그러면 비싼 노트만 먼지 쌓여요.
제일 싼 노트를 사세요. 폰 메모 앱을 쓰세요. 냅킨에 써도 돼요. 형식은 상관없어요. 빠짐없이 쓰는 것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 저도 맨날 빼먹는데, 쓴 날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값져요. 자기 전 5분, 아침 커피 마시면서, 버스 기다리면서 심심할 때.
날짜. 장소. 있었던 일. 놀랐던 디테일 하나. 이게 전부예요.
3년 뒤에 옛날 사진을 넘기다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짜로 기억해낼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하루 5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고요.



